검색결과
-
김정숙, 안동지역 여성사역의 개척자(6)김정숙, 안동지역 여성사역의 개척자(6) 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정숙 전도사 (金貞淑, 1880~1969) 목차 서론 1. 김정숙, 출생과 결혼 2. 최초의 순교를 목도한 시댁 3. 여성복음전도의 선구자 .............................................. 7. 안동교회 최초의 전도사 8. 경안노회 여전도회 연합회 리더 9. 일제에 저항한 애국운동가 10. 평신도 사역자 결론 9. 김정숙, 일제에 저항한 애국운동가 안동 3·1 만세의 1차 시위는 임시정부 국무령 이상용(李相龍) 선생의 실제(實弟)인 이상동(李相東, 영양 포산교회, 영덕 원전교회) 조사에 의해 발생했는데, 그는 안동 장날인 3월 13일 하오 5시 반경 단독으로 만세를 부르다가 일경에 체포 구속되었다. 사실 이상동 조사가 단독시위를 감행하기 전, 안동교회 김영옥 목사, 이중희 장로, 도청 서기인 김원진, 일본 유학생인 강대극 등 4인은 3월 13일 안동 장날에 거사할 것을 모의하다가 일경에 검거되어 3·1 만세운동이 주춤한 상태에 있었다. 이상동 조사가 안동교회 지도자들과 의논하여 결정한 거사 일자는 아니었지만, 안동에서 가장 먼저 만세 시위를 주도한 지도자들이 결정한 바로 그날인 3월 13일 오후 5시 반경에 안동에서 최초로 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상동 조사는 ‘대한독립만세’가 쓰여진 태극기 모양의 종이 연을 들고 현재 신한은행 앞에서 동쪽 방향인 삼산우체국 쪽으로 달리면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었다. 그는 체포되어 압송되어 가는 자동차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의해 대한민국은 10일을 넘기지 않고 독립될 것이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만세를 불렀다. 이상동 조사의 1인 시위는 안동 3·1운동을 은밀히 추진하고 있던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한편으로는 위기가 되었다. 이유는 만세운동을 감행할 인물들과 안동교회가 일경에 의해 더욱 주시를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동 조사의 1인 시위는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있던 안동지역 지도자들의 검거와 조사로 위축되어 있던 모의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기폭제 역할도 하였다. 한편 안동교회 여성 지도자였던 김정숙, 김병규. 이권애 등 3인은 1911년 안동교회가 설립한 여성 초등학교인 계명학교 여학생 30여 명을 동원하여 선교사 임시주택이었던 가옥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국기를 제작하여 비밀스럽게 만세운동에 참여할 준비를 하였다. 3·18일 만세시위가 있던 날 김정숙, 김병규, 이권애 등 3명의 여성 지도자들은 옥고(獄苦)를 각오하고 옷고름을 뗀 뒤 단추를 달고 계명학교 여학생 30여 명을 인솔하고 만세운동에 참가했으나 당시 여론을 의식한 일제는 김정숙 등 3명은 물론 학생 1명도 구속하지 못했다. 또한 안동의 3차 만세운동은 3월 23일(주일) 오후 7시 30분 무렵부터 시작됐는데 앞선 2차 시위와는 다르게 안동군의 다른 면민들이 대거 참가하는 대중적인 시위 양상을 보였다. 무려 3,000여 군중이 모여 구금된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경찰서와 법원 안동지청으로 밀고 들어갔다. 일본 경찰과 수비대와 충돌로 인해 30여 명이 죽고 50여 명이 부상을 입을 정도로 시위는 격렬한 양상을 보였다. 김정숙은 1919년 3월 18일의 2차 시위와 23일에 있었던 3차 시위 등 안동의 3·1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행동하는 신앙인인 동시에 애국운동가였다. 참고로 3·1 만세운동에 참여한 여성지도자인 김병규는 안동의 기독청년면려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의 아들 권중윤은 대구 계성학교 학생으로 대구 만세운동에 가담하였다가 구속되어 6개월 동안 수형 생활 후, 학교를 졸업하고 안동으로 돌아와 계몽운동을 하던 중 1921년 2월 5일 안대선 선교사가 전국에서 최초로 안동교회 청년면려회를 조직할 때 초대 회장으로 피선되었다. 그 후 안대선 선교사를 도와 경북지역 각 교회에 다니면서 청년면려회를 조직하여 1921년 6월 7일∼9일까지 26개 지회 600여 명이 모여 경북연합대회를 개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22년 청년면려회를 전국적으로 조직하기 위하여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안대선 선교사와 권중윤을 서울로 이주케 하여, 이들의 헌신적인 활동을 통해 1923년, 200여 교회에 청년면려회가 조직되었고, 1924년 12월 2일에는 서울 정동 피어선 성경학교에서 기독청년면려회가 조직될 수 있었다. 3·1 만세운동 당시 안동교회 교인이었던 김병규는 공식적으로 1924년 5월 22일, 안동교회에서 서울 안국동교회로 이명했다. 김병규는 이명 후 불과 몇 년 되지도 않은 1925년 초 경기부인전도회의 서기를 맡을 정도로 왕성히 활동했다. 또한 김병규는 서울 승동교회에서 회집한 경기지역 12 교회 부인회의 회장으로 피선되었다. 1925년 전국 부인전도회가 처음 조직할 때는 선교사 중심으로 조직되었는데, 한국인으로 임원을 구성한 2회 총회부터 김병규는 한국인으로는 제일 먼저 회장으로 피선되었다. 1927년 9월 9일 원산 광석동교회에서 제16회 장로회 총회 시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발기회에서 김병규는 경기 여전도회 대표로 참석하였다. 1928년에 조직된 여전도회전국연합회에 경기지역 대표로 활동했다. 이처럼 김병규는 전국적으로 왕성히 활동한 여성 교역자였다. 김정숙 전도사의 애국 활동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는 일제 말엽에는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킨 여성 지도자였다. 1930년대 후반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일본제국주의는 황민화정책과 천황숭배를 강화하기 위해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 굴복하여 1935년에는 천주교회가, 1936년에는 감리교회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1938년에는 장로교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였다. 일제의 극한 박해와 신사참배 문제 앞에서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은 신앙을 포기하고 변절과 타협의 길로 갔지만, 김정숙 전도사는 죽음도 불사하면서 마지막까지 일제에 저항했다. 참고로 경안노회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한 인물로는 이원영·강병철·박충락 목사와 권수백 장로 등이다. 특히 안동교회의 인물로는 김익현·김성규·김재성·조흥로 장로와 조춘백, 이수원·이수형 성도 등 다수가 있었지만, 기록으로 남아 있는 여성 교역자로는 김정숙 전도사가 유일하다. 그는 죽음도 불사한 각오로 신앙의 정조(貞操)를 지켰던 용기 있는 믿음의 여성이었다. 김정숙은 일제 압제하에서도 용기 있게 신앙에 기초하여 민족의 편에 선 여성 민족 운동가였던 것이다. ▲안동의 3·1 만세운동은 세 차례에 걸쳐 발생했다. 1차 시위는 3월 13일 이상동의 단독시위였고, 2차 시위는 3월 18일 안동교회 주도와 유림들의 동참으로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졌다. 3월 23일 3차 시위는 많은 군민들의 격렬한 시위 결과 100명 가까운 사상자를 내었다. 3·18일 만세시위가 있던 날 김정숙, 김병규, 이권애 등 3명의 여성 지도자들은 계명학교 여학생 30여명을 인솔하고 만세운동에 참가했다. 위 사진은 1925년 삼산동 곡물전(현 신한은행 근처) 안동 장날의 번잡한 모습.(사진7)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
90년 동안 한 교회를 섬긴 여성지도자 김점향 권사(1)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점향 권사 (1907~1998) 안동교회 첫 예배는 4명씩 동수(同數)의 남·여가 함께 예배를 드렸다. 외할머니 등에 업혀 예배를 드린 아기를 포함하면 4명의 남성, 5명의 여성이 된다. 안동교회는 시작부터 균형 잡힌 성 비율로 하나님을 예배했던 것이다. 당시 시대적 상황은 남성중심의 교회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래도 교회 안에서 여성의 발언권도 무시할 수 없었다. 초기부터 뛰어난 여성 일꾼들이 안동교회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선교사와 남성 교인들을 도와 새롭게 출범한 안동교회를 든든히 세워나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본 글은 3살 때 외할머니 등에 업혀 안동교회 첫 예배에 참석한 이래 무려 90년 동안 안동교회를 섬긴 김점향 권사님에 관한 것이다. 결혼 후 수년 동안 안동을 떠나 영주로 외도(外道)하기는 했지만 거의 100년 가까이 동안 한평생 안동교회를 섬겼으며, 안동교회 여전도회와 경안노회 여전도회의 중심인물로 여전도회를 든든히 세운 여성 지도자였다. 1. 할머니 등에 업혀 안동교회 첫 예배에 참석한 아기 1909년 8월 8일, 안동교회는 감격스러운 첫 예배를 드렸다. 안동읍 최초의 교회가 설립된 것이다. 당시 안동 최초의 근대서점인 기독서원(基督書院)에서 8명이 모여 첫 예배를 드렸고, 안동 땅에 복음이 전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첫 예배를 드린 초대교인은 김병우, 강복영, 원화순, 원홍이, 권중락, 박끝인, 정선희, 김남홍 제씨였다. 다음은 8월 8일 주일 아침의 상황에 대해 김남홍의 외손녀 김점향이 생전에 들려준 내용이다. 김남홍의 집은 현재 100주년 기념관 바로 뒤편 화성동 언덕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날 아침 평소에 들을 수 없는 북소리가 들려왔다는 것이다. 주일 아침 누군가 북을 치면서 마을을 돌며 동네 사람들을 모았던 것이다. 김남홍이 무슨 생각으로 동네 아래에 있던 기독서원에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발걸음은 그를 예수 믿게 하는 기회가 되었다. 기독서원에 간 김남홍은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여기 오면 아들을 낳을 수 있느냐”는 질문을 했다고 한다. 그때 거기에 있던 사람들로부터 아들을 낳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큰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후부터 빠지지 않고 예배에 참석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김남홍은 안동교회의 첫 예배에 참석한 초대교인이 되었다. 외할머니 김남홍은 1910년 8월 18일에 학습을 받고, 1911년 8월 17일에 세례를 받음으로 안동교회의 세례교인이 되었다. 특히 그는 1913년에 조직된 안동교회 여전도회의 중심회원으로 열심히 참여하였다. 또한 김남홍의 남편인 권정택은 안동교회 첫 세례자 9인 중 한 사람이었다. 당시 안동읍에는 그리스도인이 거의 없는 상태였지만,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모두 그리스도인인 가정 분위기에서 외손녀 김점향은 성장할 수 있었다. 이것은 김점향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 속에서 자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을 것이고, 그는 자연스럽게 믿음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2. 믿음의 분위기에서 성장하고 결혼한 여성 김점향의 부친이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되자 김점향의 외조모는 자신의 집에서 딸과 외손녀인 김점향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했다. 김점향이 3세 되던 때 외조모는 예수를 믿기 시작했고, 그 이후부터 외조모의 등에 업혀 성장한 김점향은 자연스럽게 찬송과 기도를 듣고, 선교사들과 성도들의 예배 모습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믿음 안에서 성장한 김점향은 23세 때 영주 내매교회 출신인 강신효와 결혼하였다. 강신효의 바로 위의 형은 강신충 목사로 당시 영주에서는 믿음을 가진 유명한 집안이었다. 김점향은 결혼 후 영주로 가서 생활하다가 나중에 안동으로 다시 왔다. 강신효의 부친은 강신효에게 많은 재산을 주었다고 한다. 영주 재산을 모두 처분하고 안동으로 이사온 강신효는 정미소를 시작했는데, 안동 최초의 방앗간이었기 때문에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한다. 하지만 경영을 잘하지 못하고 식구가 늘어감에 따라 가세가 조금씩 기울기 시작했으며, 6·25 전쟁으로 건물이 모두 타버려서 경제적으로 점점 힘들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와중에서도 성숙한 믿음으로 성장한 김점향은 교회와 노회에서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하는 여성 지도자가 되었다. ▲1910년 영주 내매에서 열린 춘계 평신도 성경공부반 중 남자 성경공부반 모임.(중앙 맨 뒷줄에 권찬영 선교사.) 이 성경공부반이 모인 내매에는 이미 교회가 세워져 부흥하고 있었다. 3. 안동 3·1만세운동 당시 태극기를 흔든 어린이 안동지방의 기미년 3·1만세운동은 김재명과 강대극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들은 김영옥 목사와 이중희 장로 등 안동교회 지도자들과 의논한 결과 3·1만세운동 날짜를 3월 13일로 정했다. 그러나 거사 하루 전날 김영옥·이중희·강대극·김원진 등 주역 4인이 검거됨으로써 3·1만세운동은 좌절되는 듯 했다. 하지만 다음 장날을 거사일로 다시 정하고 세밀하게 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그리하여 3월 18일 낮 12시경, 김병우 장로와 김익현 조사의 ‘대한독립만세’ 소리를 시작으로, 안동교회 교인 30여 명은 삼산동 곡물전 앞에서 온 힘을 다해 만세를 불렀다. 이때 동문통에서 내려오고 있던 유림의 시위대와 합쳐지고, 장터에 모인 읍민들도 합세하면서 안동읍 최초의 대규모 만세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안동의 3·1만세운동에는 안동 최초의 여자 초등학교인 계명학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당시 계명학교를 다니고 있던 김점향이 태극기를 들고 시내를 뛰어 다녔다고 김점향의 자부인 박춘희 권사는 증언했다. 어린 학생들에게는 태극기를 나누어 주지 않았지만 학생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장터와 읍내를 돌아다녔다고 한다. 일제는 그가 너무 어려서인지 체포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위가 격해지자 목성교에 시체가 하나 둘씩 늘어가기 시작했고 이것을 본 김점향의 할아버지는 더 이상 김점향이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또한 일제가 발포하기 시작했을 때 총알이 방안으로 들어온다고 하며 이불로 문을 막아놓았다는 것이다. 어린 아이였던 김점향은 자신이 외친 대한독립만세가 무슨 의미인지도 정확히 몰랐겠지만 전국에 타올랐던 3·1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안동 3·1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8일 열렸다. 안동교회 교인 30여 명은 삼산동 곡물전(현 신한은행 근처) 앞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있는 힘을 다해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위 사진은 1925년 당시 삼산동 곡물전 근처 안동 장날의 번잡한 모습.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
경북 도립교향악단, ‘불멸의 꽃 무궁화’음악회 공연경상북도는 오는 20일(수) 저녁 7시30분 포항시 효자아트홀에서 ‘3.1절 100주년 기념 대화합 음악회’를 개최한다고 밝혔다. ‘불멸의 꽃 무궁화’란 부제로 열리는 이번 음악회는 3.1운동이 활발했던 포항에서 선조들의 정신을 되새기고, 지난 지진 여파 등으로 아픔을 겪고 있는 포항시민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치유하기 위해 마련했다. 경상북도 도립교향악단 백진현 상임지휘자의 총괄지휘에 맞춰 소프라노 이윤경과 도립국악단 민요팀, 포항시립합창단이 특별출연해 민족의 혼과 리듬이 실린 곡들을 아름다운 선율로 관객들에게 전해준다. 이번 3.1절 100주년 기념 음악회는 베르디의 오페라 ‘운명의 힘’ 으로 공연의 막을 연다. 베르디의 운명의 힘은 어떤 장면보다 서곡이 유명한데, 베르디 작품 중에서 관현악 구성의 완성도가 가장 높은 곡으로 꼽힌다. 전반부에는 인간을 파멸로 이끄는 운명의 힘을 간절하고 구슬프게 그리지만, 후반부로 가면서 곡은 현악기들의 휘몰아치는 연주에 타악기가 가세하여 밝고 힘찬 분위기를 표현한다. 이어 소프라노 이윤경이 아름다운 가사와 멜로디를 지닌 우리가곡 ‘강 건너 봄이 오듯’과 ‘그리운 금강산’을 노래하고, 도립국악단 민요팀이 밀양아리랑을 비롯한 ‘아리랑 민요메들리’를 들려준다. 특히, 공연 후반부에는 이철우 작곡의 ‘불멸의 꽃-무궁화’가 처음으로 공연돼 관객들의 관심을 사로잡을 예정이다. ‘불멸의 꽃-무궁화’는 「대한제국 애국가」와 동요 「무궁화」를 주제로 권창희 교수의 글 ‘불멸의 꽃’에 음악을 입혀 관현악, 합창과 독창이 어우러지게 만든 민족정신을 드높이는 「국민음악적 칸타타」이다. 한편, 경북도는 도민들이 클래식 음악과 더욱 친숙해 질 수 있도록 21일(목) 저녁 7시 영덕 예주문화예술회관에서 ‘도립교향악단 신년음악회’를 개최한다. 드보르작의 교향곡9번 ‘신세계로부터’와 차이코프스키 ‘이탈리아 기상곡’등을 오케스트라로 선보이고, 국악인 오정해가 특별 출연해 클래식과 국악이 어우러지는 멋진 공연이 펼쳐진다. 윤종진 경북도 행정부지사는 “이번 음악회는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민족의 자긍심을 고취시키고, 독립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며 희망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곡들로 마련했다”며 “대한독립 만세를 불렀던 100년 전 감동을 도민들이 다 함께 느낄 수 있는 대화합의 음악회가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공연문의> 도 문화예술과 054)880-3126, 도립교향악단 053)324-7279
-
목사·애국자·인간 박상동 목사(1)김승학 목사신학과 교수/기독교 교육학안동교회 담임목사 박상동 목사 (朴尙東, 1894~1949) 들어가면서 안동교회 제4대 담임목사(1925~1928)로 시무한 박상동(朴尙東, 1894~1949) 목사는 아버지가 목사였고, 목사의 아들을 두었으며, 한국교회에서는 단 한 자릿수에 불과한 직계목사 손자를 둔 4대 목사 가문(家門)의 중심이었다. 그의 조부(祖父)·부친(父親)뿐 아니라 그 역시 민족을 사랑한 애국자였다. 그래서 고등학생 신분으로 6개월의 옥고(獄苦)를 치르기도 했다. 극일(克日)하기 위해 박상동 목사는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일본유학을 떠났다. 일본에서 4년 동안 신학을 공부하며 오사카와 고베에 거주하고 있던 재일교포를 위해 쉬지 않고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했다. 귀국한 후 안동교회를 섬기면서 전도, 사회봉사, 교회조직의 변화, 다음 세대의 신앙교육 등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의 헌신을 통해 안동교회는 새롭게 리모델링(Remodeling)되어 시대에 맞는 교회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박상동 목사는 이민자의 삶의 고단함과 고통을 외면하지 못하고 안동교회 사역을 중단한 채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와 나고야, 그리고 인근 지방의 복음화와 교회개척에 거룩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당시 한국과 재일교회를 위한 사도바울과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일제 말엽 그는 교포들의 인권개선노력과 민족독립운동의 죄목으로 또다시 옥고를 치렀다. 생사(生死)의 고비에서 해방과 함께 석방되어 귀국한 박상동 목사는 끝없는 복음의 열정으로 교회를 섬기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박상동 목사는 복음을 위해서라면 어떤 고초도 마다하지 않고 자신의 등에 십자가를 지는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성도와 자녀에게는 인자하고 겸손한 목사요 아버지였다. 그는 음악을 좋아했으며 자식들에게 사랑의 아버지로 기억되고 있다. 이 글은 박상동 목사의 일생을 기록한 소고(小考)이다. 하지만 이 글에는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할 믿음의 가문, 믿음의 사람의 거룩한 흔적을 포함하고 있다. 이제 독립운동가요, 복음전도자요, 교육자요, 아버지요, 음악을 좋아한 사람이요, 목사요, 인격자인 인간 박상동을 감사한 마음, 기대하는 마음으로 만나보자. 1. 마태복음 1장의 ‘낳고, 낳고, 낳고’를 재현(再現)한 가정 마태복음 1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다. 그 족보는 아담에서 시작하지 않고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한다. 박상동 목사 집안도 초창기 한국교회 믿음의 계보를 이어가고 있는 명문가문이다. 1) 1대 박영화 목사박상동은 1894년 경북 의성군 비안면 쌍계리에서 박영화(朴永和, 1859~1923)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박영화는 1902년경에 김인옥, 이성준의 전도를 받고 전 가족(부친인 박용한과 3남 8녀) 모두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군위군 호암교회에 출석하다가 다음 해인 1903년 쌍계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그는 특별히 교육에 관심을 갖고 1910년 농촌지역 복음화와 인재양성을 위해 쌍계교회에 정림학교(1920년 폐교)를 설립하여 운영한 명망 있는 지역의 지도자였다. 이런 박영화는 1914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918년 제11회로 졸업하고 동년 6월 경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쌍계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시무했다. 그는 1919년 3·1 의성 만세운동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후 경남 거제시 사능교회 초대담임 목사로 부임하였다. 이후 박영화 목사는 거제도와 통영 등 경남지역 초기 교회의 존경받는 목회자로 자리매김하였다. 2) 2대 박상동 목사이러한 신앙적 분위기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박상동은 아버지와 기독교에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대구 계성학교 출신으로, 부친과 함께 3·1 만세운동의 옥고를 치른 후 일본 고베에 있는 칼빈계 고베중앙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1925년 귀국하여 안동교회 강도사로 부임하였다. 박상동은 안동교회 강도사로 시무하면서 평양신학교에서 별신학(別神學) 과정 1년간을 수학하였다. 박상동 목사는 1926년 9월 경안노회(제11회)에서 목사안수 후 안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1885년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온 지 41년 만에 직계(直系)로 부자(父子)가 목사 임직자가 됨으로써 아버지, 아들 목사가 탄생하게 되었다. 3) 3대 박대선 목사경북 의성군 비안면에서 박상동 목사의 장남으로 출생한 박대선 목사(1916~2010)는 1940년 일본관서학원대학교 영문과와 1942년 동 대학 신학과를 졸업하고 1955년 미국 보스톤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구약신학전공으로는 한국인 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40년부터 1942년까지 니시노미야시 한인교회의 담임전도사로 사역했으며, 귀국하여 1942년부터 1950년까지 평양 창광산교회, 박구리교회, 중앙교회, 서평양교회 등을 섬겼다. 박대선 목사는 1945년부터 1950년까지 평양성화신학교 교장대리 역임, 1955년부터 1964년까지 서울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 역임, 1959년부터 1962년까지는 서울 광화문감리교회에서 담임목회를 했다. 특히 1964년부터 1975년까지 연세대학교 총장을 역임하다가 3선 임기 중 저항 운동에 나선 교수의 복직을 반대하던 당시 정부와 심한 불화를 겪다가 사임하였다. 4) 4대 박태기 목사박대선 목사의 차남인 박태기 목사는 공학박사로서 KIST의 책임연구원으로 있다가 소명을 받고 감신대를 졸업한 후 목사가 되었다. 중진 과학자로서 인정받고 안정된 생활을 하다가, 일생의 여름과 같은 때에 성직의 길에 들어섬으로써 대(代)를 이어 직계 4대 목사 가문(家門)을 이어가고 있다. 2. 애국자 박상동 의성에서 3·1 독립만세가 크게 울려 퍼진 날은 1919년 3월 12일이다. 11일에 의성군 비안공립보통학교 학생 150여 명이 학교 뒷산에 올라가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친 것이 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쌍계리에서 쌍계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만세운동의 중심인물은 김원휘 조사, 김충한, 쌍계교회 박영달 장로, 박영화 목사, 그리고 대구 독립만세 시위운동(3월 8일)에 참여한 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한 박상동(당시 대구 계성학교 2학년생) 등이다. 이들은 3월 12일 정오, 박영신의 집 앞에 모인 2백여 명의 시위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하였다. 이렇게 촉발된 의성지역의 만세시위는 4월 3일 가음면 구천시장의 ‘1인 만세시위’까지 23일간 계속되었다. 이후 박상동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부친과 그의 형제들, 그리고 박상동은 함께 의성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독립운동가정이었다. 6개월의 옥고를 치른 박상동은 일본을 올바로 알아야 일본을 극복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일본 고배중앙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생활은 고베, 오사카, 교토 등에 거주하고 있던 재일동포를 위해 교회를 개척하고 섬기는 기간이었다. 졸업 후 1925년 귀국하여 3년여 동안에는 안동교회를 섬겼다. 특히 이 기간에 박상동 목사의 민족의식이 나타난 것은 1928년 3월 경안노회 여전도회 도사경회와 5월 23일부터 1주일 동안 계속된 성경사경회였다. 당시 일본 경찰의 요시찰 인물이었던 길선주 목사가 안동을 방문했다. 약 200명이 참석한 성경사경회의 주제는 ‘애굽의 금자탑’으로 자유와 해방을 갈망하는 많은 백성에게 희망을 주었다. 한편, 사경회 기간 중 길선주 목사는 일경에 체포되었으며. 구류 20일 후 출소한 길선주 목사는 예정대로 사경회를 마치고 평양으로 돌아갔는데 이 사건은 사경회에 참석한 교인에게뿐 아니라 주위 교회 성도들에게도 깊은 도전을 주었다. 이후 박상동 목사는 1928년 파송 받아 다시 오사카로 돌아가 순회목사로 교회를 섬기는 일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일제 말엽 박상동 목사는 또다시 투옥되었다. 박상동 목사는 1941년부터 1943년까지 일본 각지를 순회하며 민족의식의 고취, 일제의 조선에 대한 식민지통치 비판, 기독교도의 동방요배와 신사참배 반대 등의 운동을 하기도 하였다. 1941년 나고야 동부교회를 담임하고 있을 때 박상동 목사는 당시 지역 교회지도자들 10명과 함께 예비 검속되어 체포되었다. 이때 박상동, 추인봉, 김은석 목사도 포함되었다. 투옥된 박상동 목사는 밤마다 구타 등 고문을 당하는 고초를 당했다. 석방과 투옥을 반복하다가 그는 옥중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정부에서는 박상동 목사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의성군 비안면 ‘3.1운동 경상북도시발지 기념공원’에 세위진 기념탑 /논문 정리=박은숙 기자/ <논문 원본 www.gbhana.com>
-
이 땅에 거룩한 흔적을 남긴 사역자, 김영옥 목사(3)김승학 목사 신학과 교수/기독교교육학 안동교회 담임목사 김 영 옥 목사 (金泳玉, 1871-1952) 경산사월교회, 포항제일교회, 영주제일교회, 풍기성내교회 등에서 사역 … 안정과 성장에 기여 7. 경북지역의 초대교회를 든든히 세운 주의 종, 김영옥 김영옥 목사는 안동지역과 경북 북부지역에 산재한 지역 교회들을 든든히 세운 교회지도자였다. 그는 1921년 사임하고 1년 동안 영주, 지곡, 명동, 풍산, 수동 등 교역자가 없는 미약한 교회들을 순행하며 자청하여 순회목사로 사역함으로써 이들 교회가 중심을 잡고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게 했다. 또한, 그는 안동교회를 떠난 후 경북 경산사월교회, 포항제일교회, 영주제일교회, 풍기성내교회 등에서 사역함으로써 경북 북부 지역 교회가 이전보다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되었다. 사월교회 9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김영옥 목사는 목회뿐 아니라 경북 일대 장로교 지도자들에게 점조직으로 독립공채모집을 독려했는데, 독립공채모집운동은 상해 임시정부를 후원하고 태평양 국제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모금하는 운동이었다. 더욱이 김영옥 목사는 교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을 뿐 아니라 이웃에게 인정 많은 목사였다. 그 결과 4년 동안 사월교회를 섬긴 후 포항으로 이사할 때 이삿짐을 소달구지에 싣고 많은 교인이 포항까지 따라갔다고 한다. ▲경산 사월교회 전경 또한, 포항제일교회는 1924년 1월 김영옥 목사가 부임한 이후 주일학교가 급성장했는데, 그 이유는 김 목사가 주일학교에 관심을 갖고 열심을 다했기 때문이다. 당시 포항제일교회는 오전에는 주일학교만 하고 오후에 주일예배를 드렸는데, 김영옥 목사 부임 후 학습·세례자가 매년 평균적으로 40~50명씩 증가했다. 교인의 증가로 교회를 건축할 때도 김영옥 목사는 건축기성회 회장을 맡아 교인들과 함께 건축에 적극 참여했다. 이처럼 김영옥 목사가 시무하는 동안 포항제일교회는 부흥하였고, 포항의 복음화를 위해 더 큰 준비를 하였다. ▲포항제일교회 전경 1929년 권징문제로 분열된 영주제일교회를 수습하기 위해 당시 경안노회에서 원로였던 김영옥 목사가 12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김영옥 목사의 부임과 함께 혼란했던 교회는 일단 안정을 찾게 되었다. 특히 열심히 전도하는 분위기가 조성된 결과 많은 새신자가 교회를 찾게 되었고, 영주제일교회는 분열의 아픔을 극복하고 새로운 활로를 찾을 수 있었다. 영주제일교회가 안정을 되찾고 다시 빠르게 부흥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김영옥 목사 덕분이라고 「영주제일교회 100년사」는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영주제일교회 전경 1907년 설립된 풍기성내교회는 교인들 사이의 의견대립으로 1934년 6월 20일 공동의회를 통해 교회분립을 결정하였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1934년 12월 풍기성내교회 제3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그의 역할은 풍부한 목회경험을 바탕으로 어려움에 처해있던 교회를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김영옥 목사가 성내교회에 시무한 기간은 단 6개월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짧은 기간 동안 지도력을 십분 발휘하여 빠르게 교회를 안정시켰다. 1935년 노회에 보고된 교세는 성찬 참여 교인의 수는 188명, 유아세례인은 51명, 학습교인은 46명, 원입교인은 287명으로 전체 교인의 수가 591명이었다. 이것은 김 목사의 부임과 함께 교회가 급속도로 안정과 평화를 찾았다는 증거가 된다. ▲풍기성내교회 전경 이처럼 경안노회 지역을 복음화하고 교회를 잘 섬기고 돌본 것을 인정하여 경안노회는 최초로 김영옥 목사를 ‘노회 공로목사’로 추대하였다. 1948년 9월 28일 개회된 제45회 조선예수교장로회 경안노회에서 “김영옥 씨를 공로목사로 추대하고 월 5,000원씩 사례하기로 가결”하게 된다. “신앙과 애국은 별개가 아니다” … 교회를 지키면서 독립운동에 앞장선 애국지사 8. 국가와 민족을 사랑한 애국자, 김영옥 김영옥 목사는 신앙에 기초한 분명한 국가관을 갖고 있던 인물이었다. 1906년 9월에 개최된 장로교 공의회 경성소회 회의에서 “교인으로는 교회를 순종하고 국민으로는 국가에 순종할 방침이란 문제”에 관해 발언했다. 그는 일제의 강점기 동안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지침을 분명하게 밝히면서 신앙과 애국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분명한 의식을 갖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의식은 김영옥 목사로 하여금 비록 일제의 강압적인 지배하에서도 교회를 지키면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독립운동에 헌신하게 했던 것이다. 안동지방의 기미년 3·1만세운동 시작은 두 사람에 의해 시작되었는데, 모두 김영옥 목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첫째 인물은 당시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재학생인 김재명(金在明)이 서울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족운동의 실태와 독립만세운동에 관한 정보, 그리고 독립선언서를 그의 부친인 김병우 장로를 통해 안동교회로 제공하게 된 것이다. 두 번째 인물은 당시 동경 유학생으로서 2·8 독립선언에 참여하였던 강대극(姜大極)이 일본에서 안동으로 귀국하여 당시 안동군청 서기였던 김원진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들은 비교적 집회가 자유로웠던 안동교회를 찾아와 김영옥 목사와 이중희 장로 등 안동교회 지도자들과 의논한 결과 구체적으로 안동 3·1만세운동 날짜를 3월 13일 장날로 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안동의 3·1만세운동은 3월 12일, 김영옥·이중희·강대극·김원진 등 주역 4인이 거사 하루 전날에 검거되어 조사를 당함으로써 좌절되었다. 일경은 만세운동 계획에 관한 단서를 잡지 못해 이들을 석방하게 되고, 다만 이중희 장로(당시 60세)는 투옥 중 얻은 질병으로 석방된 지 6일 만에 별세하게 된다. 첫 거사일은 놓쳤지만, 만세운동의 주도자들은 포기하지 않고 다음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계획을 수립했다. 결국 3월 18일 낮 12시경, 김병우 장로와 김익현 조사의 선창 신호에 맞춰 안동교회 교인 30여 명, 유림에 의해 주도된 다른 시위대, 그리고 장터에 모인 읍민들이 모두 합세하여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깃발을 앞세우고 안동읍 최초의 대규모 만세운동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수많은 읍민들이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는데, 안동교회 교인으로 김병우 장로는 2년, 김익현은 1년, 김재성·김계한·이인홍·황인규·권점필은 6개월씩 각각 복역했다. 김영옥 목사는 1922년 1~2월 경 9명의 장로교회 목사들과 함께 평북 중강진 감옥 또는 경찰서에 압송되었다. 9명은 당시 그 지역의 대표적인 지도자들이었는데 김영제 목사(길주 명천교회), 정덕생 목사(부산 초량교회), 이자익 목사(전북 금산교회), 최영택 목사(충북 청주읍교회), 장사성 조사(안동신세교회) 등이었다. 그들은 태평양회의와 관련하여 상해 임시정부를 위한 군자금 관련 피의자로 50일 동안 취조를 받고 석방되었다. 이때 일제는 각 지역에서 시무하면서 이미 요시찰 인물로 감시 대상이었던 당시 교회 지도자들이 비록 청원서 명단에는 빠져 있었지만 중강진 감옥이나 경찰서로 압송해 혹독한 취조를 했던 것이다. ▲1922년 일명 태평양회의로 인해 중강진 감옥이나 경찰서로 압송되어 큰 고초를 겪는 당시 장로교 지도자들로 ①김영옥목사, ②김영제목사, ③정덕생목사, ④이자익목사, ⑤최영택목사, ⑥장사성조사 등으로 석방된 후 찍은 사진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김영옥 목사는 포항교회(현 포항제일교회)를 담임으로 섬길 때 1927년 4월 교회 중직자들과 상의하여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를 포항에 설치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신간회 영일지회를 발기하고 간사로 활동하면서 대회 의장까지 지내며 책임을 다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일경으로부터 계속 감시와 탄압을 받음으로써 목회와 가정에 많은 고난을 받게 되었다. 그는 교회를 섬기면서 독립운동에 관계하다가 무려 네 번이나 일경에 체포 기소되어 재판을 받는 등 고난을 당했다. 그의 이러한 정신은 해방 후에도 계속되어 그는 남조선과도정부 문경군과 예천군의 민선 입법의원으로 피선돼 혼란한 국가를 위해 1년 동안 봉사했다. 그는 정통보수주의 편견에서 벗어나 에큐메니칼 정신이 투철했다. 그는 교파주의의 편협한 사상에서 자유하여 교회와 국가를 함께 사랑하고 헌신 봉사한 애국지사였다. /논문 발췌‧정리=박은숙 기자/<논문 원본 www.gbhana.com>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use'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8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skin'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9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use'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8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skin'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9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use'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8
Warning: Illegal string offset 'skin' in /home/jane82850/public_html/theme/wide01/mobile/skin/search/basic/search.skin.php on line 139